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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묵지/책 더하기 · 리뷰

[촐라체] 그것은, 촐라체 북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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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촐라체>는 2005년 1월 산악인 박정헌, 최강식이 에베레스트 서남쪽에 있는 촐라체(6440m)를 북벽 루트로 등정한 후 하산 중 사고로 7일 만에 극적으로 생환한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최강식이 크레바스로 약 25m 추락하면서 양 발목이 골절되었고, 안자일렌을 하고 있던 박정헌은 갈비뼈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다. 최강식은 등강기로 크레바스를 탈출하고 둘은 서로 의지하며 구르고 기어서 하산 하던 중 야크 몰이꾼을 만나 구조되었다. 추위에 탈진 상태였던 박정헌은 손가락 8개와 발가락 2개를, 최강식은 10개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모두 잃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2014년 SBS스페셜 "하얀블랙홀"이라는 드라마 다큐멘터리로 소개되기도 했다.




# 작가의 말 – 여기, 존재의 나팔소리를 들어보라 -10-11p.

감히 고백하거니와, 나는 ‘존재의 나팔소리’에 대해 썼고 ‘시간’에 대해 썼으며, 무엇보다 불가능해 보이는 ‘꿈’에 대해, 불멸에 대해 썼다.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현대인에게, 또는 자본주의적 안락에 기대어 너무 쉽게 ‘꿈’을 포기하는 젊은 내 아이들에게 들려주고자 이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것은 숨기고 싶지 않다. (중략)

히말라야에서 사는 사람들은 5천 미터가 넘는 산도 일반적으로 ‘마운틴’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정도의 산은 ‘힐’이라고 부른다. 인생에서 만나는 고통스런 굽잇길도 그저 언덕이라고 부르면서 환하게 넘고자 하는 본원적인 낙관주의야말로 살아 있는 것들이 가진 존재의 빛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절대로 훼손되지 않는, 존재가 품고 있는 영원성이다.



# 첫째 날 

졸라 조용하네요.

나의 대답이 그랬었지.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그처럼 고요한 세계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여러 번 암벽 등반을 다녀봤지만 우리나라에선 어디에 있든 소리가 쫓아온다. 사람소리 찻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라도 들린다. 완전한 정적이란 없다. 그러나 촐라체 베이스캠프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내가 맞닥뜨린 것은 숨 막힐 듯한 정적. 정적이 무섭진 않냐. 형이 또 묻고, 뭐 별로요…… 내가 대답했다. 형은 그러자 으흐흐흐, 하고 기분 나쁘게 웃고, 혼자말하듯 덧붙였다. 이 정적이…… 말하자면 고독의 맨얼굴이야. 이제부터 베이스캠프에서 너도 이놈 맨얼굴을 질릴 정도로 보게 될걸. – 48p.


히말라야에서 일출 때의 햇빛은 철저히 높이의 순서를 따라 떨어진다. 더 높은 봉우리로부터 더 낮은 봉우리로 햇빛이 내려앉는 것이다. 에베레스트 다음엔 로체가 조명을 받는다. 마칼루(Makalu, 8463m)는 그 세 번째다. 마칼루와 로체의 기생봉인 로체샤르(Lhotse Shar, 8400m)의 높이 차이는 불과 63미터에 불과 하지만, 높이 서열에 따른 일광의 낙하 순서는 영원히 흐트러지지 않는다. (중략)

세계의 모든 길이 시작되고 모든 길이 끝나는, 그래서 가장 먼저 햇빛을 받은 에베레스트는 지금 막 화관을 정수리에 얹고 있다.

로체, 마칼루, 초오유, 로체샤르가 차례로 그것을 이어받는다.

마치 음계를 짚고 내려가는 그랜드피아노의 속살을 보는 듯하다. 8천 미터의 봉우리들에 화관이 다 얹혀지고 나면 6천 미터급 봉우리들로 불길이 옮겨 붙는다. 탁, 탁, 탁, 탁…… 하고 도미노로 수많은 설봉들이 불을 켜 드는 것 같다. 아다지오로부터 단계를 짚어 알레그로의 빠르기로 휘몰아쳐 내려오는 놀라운 대자연의 연주이다. 가슴이 막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아 나는 그만 흡 하고 숨을 막는다.

햇빛이 이윽고 내 이마에 꽂힌다. – 54p.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은 나날이 그 사랑을 상실해가는 ‘삭막한 과정일 뿐’ 이라는 신혜의 말에 나는 간신히 동의한다. 사랑을 간직하려면 그걸 버리는 수밖에…… 라고 말하려는데, 검은 휘장이 눈앞을 완전히 덮는다. 이제 촐라체도, 벽도 없다. 어둡다. – 71-72p.



# 셋째 날

가만히 있으면 말을 모조리 잊어버릴 것 같았다. 진공 지대의 적막이 아마 그럴 터였다. 망원경을 들여다보다가, 혹은 책을 읽다가, 어느 순간 나는 와락 정적이 무서워 짐짓 서성거리면서, 소리 내어, 대답 없는 그 무엇엔가 말을 걸곤 했다. 내 말을 듣는 것이 들쥐든, 새든, 아니면 히말라야 죽음의 지대에 산다는 비행거미든, 상관없었다. 평생 동안 이런 정적을, 그것도 하루 종일 만나본 일은 처음이었다. 밤이 되면 그 정적의 공포감은 배가 되었다. 뼛골 사이로 흐르는 바람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정적이었다. – 101p.



# 넷째 날

환호는 조금도 없다. 정상에 오르면, 누가 말했던 것처럼 ‘정상은 모든 길이 시작되는 곳이고 모든 선이 모여드는 곳’이므로 엔돌핀이 분출하는 듯 기쁠 줄 알았는데, 기쁘기는 커녕 오히려 허망하고 슬픈 느낌이다. 정상엔 허공뿐이다. 겨우 이것을 보러, 목숨을 걸고 올라왔단 말인가. 더구나 눈바람 때문에 세계는 화이트아웃, 사라지고 없다. 눈 내린 평범한 민둥산 꼭대기 한 켠에 있는 것 같다.

“씨, 씨팔……”

울지 않으려고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나는 씹어뱉는다.

날씨까지 어저면 이렇게 ;싸가지’가 없단 말인가. 형에게 하는 욕인지, 아버지에게 하는 욕인지, 촐라체에게 하는 욕인지 모르겠다. 목숨을 걸고 촐라체에 왔는데, 촐라체가 없다. – 117-118p.



거칠고 악마적인 힘이다. 하늘과, 가깝고도 먼 첨봉들과, 설사면이 한 덩어리가 되어 바람개비처럼 돌아가고 있다. 어머니가 보였던가. 차가운 신혜의 눈빛을 본 것도 같다. 형태는 이지러지고 이미지는 교합된 요지경 속 그림이다. 몸이 무덤으로 끌려가는 느낌도 난다.

그리고 이내 모든 게 하얐다. – 129p.



# 여섯째 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합리성을 떠나서, 크레바스의 그 남자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소명처럼 느껴진다. 그를 확인하는 것은 김선배의 시신을 찾아 모셔가는 것과 똑같은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그것이 아니라도, 내 속의 어떤 나는 강렬하게 ,산 밑으로 어서 내려가라는 내 육체의 자연스러운 요구를, 거역하고 싶다, 라고 말하고 있다. 촐라체에게 반역하고 싶다. 순리에 따르고 싶지 않다. 어차피 죽음과 정면으로 맞닥뜨렸으니, 까짓거, 어떤 합리성에도 굴복하고 싶지 않다. 비겁한 건 질색이다. 그러면서, 나도 또 내게 들이대고 묻는다. 죽는게 혹시 두려운가. 나는 대답한다. 아니야. 두렵지 않아. 이미, 지금 내가 과연 살아 있는지,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이승의 풍경인지, 그것조차 불분명하다. 이 순간이 죽은 다음의 세상인지도 모른다.

정말 내가 마침내 미친 모양이다. – 214p.



나는 씨근덕 거리면서 영교 곁에 쓰러져 누워 그의 어깨를 흔든다. 잠들면 죽음이라 할지라도, 죽음이 오는 것조차 모르는 척하고, 눈 감고 잠들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다. 손끝까지 움직일 힘이 없다. 살아 있는 영교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혼자라면, 호수를 건너다가 나도 쓰러져 눈 감고 말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 있다.

나 혼자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우리…… 가 살아 있다. 내가 포기하면 영교도 죽는다. 그러니, 함께 가야 한다. 나도, 영교도, 혼자만의 힘으로 갈 수는 없다. 내가 앞에서 끄는 힘과 그가 뒤에서 의지를 갖고 기는 힘이 보태져야 겨우 움직일 수 있다. – 262p.


촐라패스는 북쪽의 병풍처럼 둘러쳐진 히말라야의 중심 벽 마할랑구 히말과 남쪽의 스카이라인을 이룬 힌쿠 히말의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그곳은 세상의 중심이었다. 나는 미간을 모으고 어둠 속의 히말라야를 오래 바라보았다. 어느새 구름이 모두 사라진 하늘은 가없는 별들의 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멀고 가까운 수천의 백색 능선들이 별빛에 시시각각 제 자태를 드러내 이윽고 원만한 원형을 이루면서, 나를 둘러싼 채, 우주로 떠오르고 있는 느낌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이승의 풍경이 아니었다.

불안한 잠의 불연속면에 기대어 꿈속을 흐르다가 소스라쳐 깨고 또 깰 때마다, 나는 죽은 다음에 보는 것처럼, 그 초월적인 풍경들을 보았다. 히말라야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은 죽음과 탄생 사이의 과도기적 시간을 ‘다르마타(Dharmata)’라고 불렀다. 그것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잠과 꿈 사이의 밝은 틈새라고 했다. 목숨 값에 억눌려 온갖 욕망으로 이지러져 있던 이른바 불멸의 본성이, 하나가 통째로 끝나고 다른 하나가 통째로 시작되는 그 틈새에서, 금강석보다 견고한 제 본체를 보이고, 보여주는, 은혜와 축복의 시간이 바로 다르마타였다. 나는 자고 깨고 자고 깨고 하면서, 이를테면 그때 다르마타의 빛 사이를 날렵하게 통과하고 있었다. 나에게 그것은 사랑에의 목 타는 갈망이었고, 또한 정수(精粹)의 기다림이었다. – 291-292p.



# 베이스캠프

일고 보면 촐라체까지 포함해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히말라야는 산스크리트어로 눈을 가리키는 ‘히미아(Himia)’와 보금자리를 가리키는 ‘알라야(Alaya)’의 합성어로 ‘눈의 보금자리’라는 뜻이었다. 서쪽 끝의 낭가파르바트에서 동쪽 끝까지 장장 2500킬로미터나 뻗어 있는 히말라야는, 8천 미터 이상 되는 고봉 14개를 비롯해, 수많은 설봉들을 품고 있는 지구의 등뼈로서, 아직도 대부분 사람의 발걸음을 허용하지 않는 죽음의 지대, 혹은 불멸의 초월적 상징으로 드높이 솟아 있었다. 수천의 봉우리 하나하나가 그대로 다 하나하나의 별과도 같았다.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는 말은 히말라야에선 사람이 죽으면 눈 덮인 봉우리가 된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그곳은 죽음의 지대이면서 죽음을 넘어선, 살아 있는 존재의 또 다른 얼굴이었따. – 299-300p.





<촐라체 CHOLATSE - 박범신 장편소설>

박범신

푸른숲, 2008


촐라체
국내도서
저자 : 박범신
출판 : 푸른숲 2008.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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