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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실루엣/여행 정보

고대 7대 불가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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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7대 불가사의는 BC 330년 무렵 알렉산드로스대왕의 동방원정 이후, 그리스인 여행자에게 관광의 대상이 되었던 유명한 7개의 건축물을 가리킨다. 이중 BC 2세기 전반 비잔틴의 수학자 필론(Philo)의 저서로 알려진 <세계의 7개경관(De Septem Orbis Spectaculis)>이 오늘날에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 NAVER용어사전


1. 이집트 기자의 피라미드

[사진출처 : Copyright © Goodshoot/Jupiterimages]

기자의 대 피라미드는 이집트 기자에 있는 피라미드 중 하나이다. 기원전 2560년 무렵 세워진 쿠푸의 피라미드로 완공에는 약 20년이 걸렸다.피라미드 중 가장 큰 피라미드이기에 대 피라미드라고도 불린다. 바로 옆에 아들 및 손자 파라오의 피라미드가 있다. 파라오 3대의 피라미드가 있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스핑크스가 기자의 피라미드 군 앞에 있다. 대 피라미드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다.
이집트 제4왕조의 파라오인 쿠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대피라미드는 기원전 2560년경 14년에서 20년간에 걸쳐 완공되었다. 쿠푸의 와지르였던 헤미우누가 건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11년 잉글랜드에 링컨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약 3,800년간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피라미드에는 두 개의 입구가 있는데, 하나는 가짜 통로로 통하는 입구, 하나는 현재 쓰이고 있는 9세기 초반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 마아문이 보물을 찾기 위해 뚫은 통로이다.
입구를 통과하고 오르막길을 오르면, 피라미드 내 좁으면서 길고 높은 거대한 대회랑이 나온다. 이곳에는 현재 용도를 알 수 없는 세로 홈이 있는 벽이 있다. 대회랑의 끝에 파라오의 무덤 방이 있다.

빈 무덤 설
압바스 왕조의 7대 칼리프 알 마아문(재위 813~833년) 칼리프가 구멍을 뚫고 832년 쿠푸의 무덤 방에 들어갔다. 알 마아문은 쿠푸의 무덤 속에서 쿠푸의 유골은 물론, 그가 기대했던 어떤 보물도 갖고 가지못한 것으로 얘기된다. 물론 아직도 알 마아문 칼리프가 대피라미드를 완벽히 털어 간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는지에 대해 논쟁이 있다. 하지만 빈 무덤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대피라미드 안에는 보물은 물론, 찢어진 천 조각이나 부서진 도자기 등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밀 공간
그래서 일부 역사학자들은 쿠푸의 대피라미드 안에 비밀 공간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 설명도 일리가 있는데, 대피라미드 내부에는 왕의 방이 무려 37,000개나 들어갈 정도의 공간이 있다. 또 피라미드 내부에 공간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정밀 중력계나 전자파 레이더를 이용했는데, 현재까지 확인된 대피라미드의 비밀 공간은 모두 세 곳이다.
- 왕의 방 밑에 있는 공간
- 왕비의 방으로 가는 수평 통로 아래에 직선으로 뻗어 있는 공간
- 왕비의 방 남쪽 벽에 있는 환기 통로 중간의 공간:최근에 소형 로봇을 이용해서 탐사한 결과, 통로 중간에서 금속 덩어리가 달린 칸막이가 발견되었는데, 드릴을 이용해서 구멍을 뚫고 내부를 살펴본 결과, 용도를 알 수 없는 공간이 나왔다고 한다. - WIKIPEDIA


2. 바빌론의 공중 정원(Hanging Gardens of Babylon)


현재의 바그다드 교외에 약간의 유적이 남아 있다. 기원전 600년경에 신바빌론 왕국의 왕,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메디아 출신의 왕비 아뮈티스을 위로하기 위해(사막의 나라로 출가하는 것을 싫어 했다) 바빌론에 건조한 정원이다. 기원전 538년에 페르시아 제국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고 한다. 궁전 안에 만든 높이 25미터, 1단이 넓은 장으로 5단 계단으로 되어 있는 테라스에 흙을 묻고, 물을 위에까지 끌어 올려 밑으로 흘리고, 수목과 꽃등을 심었다. 매우 컸으므로 멀리서 보면 흡사 공중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가장 위의 면적은 60평방미터로 추정한다.
스토라본과 디오도로스등의 역사서와 프리니우스의 박물지에는 언급되어 있지만, 헤로도토스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니네부에에 있었다고 하는 다른 정원과 혼동되고 있다는 설도 있다. 스토라본의 설명에 따르면 기둥과 지하실은 연기와로 만들어져 있고, 네 모퉁이를 기둥으로 받혀져 있는 높은 곳에 자리잡은 입방체의 테라스에 흙을 묻고 정원을 구성해서, 그 위에 아치지붕이 만들어져 있었다고 한다. 「매달려 있는 정원」이라는 오역이 있지만, 그것은 그리스어에서 kremastos또는 라틴어의 pensilis를 부정확하게 옮긴 탓으로 보인다. 물을 위에까지 끌어올린 방법에 대해서는 끝없이 물을 공급하는 기계, 아르키메데스의 나선식 펌프 등의 설명이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 WIKIPEDIA


3. 로도스섬의 크로이소스 거상

[그림출처 : 로도스의 거상 (1954), 달리 Salvador Dali (1904-1989) 작]

기원전 407년경 로도스섬은 도시국가연합(Rhodo-Egyptian)의 수도로 건설되어 상업적으로 번성하고, 그들의 주요한 동맹국(Ialysos, Kamiros, Lindos)과 함께 지중해 유수의 무역중심지였다.
기원전 305년 마케도니아의 데메트리오스 1세는 동맹을 깰 방법으로 도시를 관통할 수 없게 로도스를 포위하였다. 그러나 도시국가연합은 마케도니아를 무찔렀고, 그들의 단일성을 축하하기 위하여 장비를 팔아 모은 돈으로 높이 36m의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청동상(철로 보강하고 돌로 무게를 더함)을 세웠다. 이 거상은 후일 로도스의 거상으로 불리게 되었다.
상상에 의해 만든 한 돋을새김 작품이 표현하듯이 한 손으로 두 눈을 가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이 항구 입구에 양다리를 벌리고 서 있기는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어 있었다는 많은 사람들의 잘못된 믿음은 중세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거상의 건설은 린두스 시(市)의 찰스가 12년에 걸려 기원전 282년에 끝마쳤다. 이 거상은 기원전 225년경 지진에 의해 파괴되었고, 거의 한 천년간동안, 상이 파괴된 채로 놓여 있었다.
기원전 654년 아랍인이 로도스를 침범하여 부서진 대거상의 나머지를 분해하고, 그들은 시리아의 한 유대인에게 팔았다. 거상 조각이 시리아로 900마리의 낙타 등 위에 실려 운송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밖에 현존하는 것도 많으나 모두 기념비적인 의도에서 만들어졌다. - WIKIPEDIA


4.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

[사진출처 : http://ask.nate.com/qna/view.html?n=6411435]

BC 457년 건설한 제우스신전에 안치된 신상으로서, 고대 그리스의 조각가 피디아스가 8년 동안의 작업을 거쳐 완성하였다. 당시 파르테논신전의 아테네 여신상과 함께 피디아스의 2대 걸작으로 평가되었다고 전하나 오늘날에는 남아 있지 않다. 신전에는 도리아식 기둥이 양옆 모두 13개, 양끝에 6개씩 세워져 있었으며 가운데에 신상이 높이 90cm, 나비 6.6m 크기의 받침대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신상은 높이 약 12m의 목조로 되어 있었으며 보석·상아 등으로 꾸민 금으로 된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어깨에는 황금 망토를 걸치고 오른손에는 승리의 여신 니케상을 받치고 있으며 왼손에는 금으로 장식한 왕홀을 쥐고 있었다. 두 다리는 금으로 된 디딤대 위에 올려져 있었으며 발은 신상을 예배하는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놓여져 있었다.
신전은 426년의 이교 신전 파괴령으로 파괴되었으며 6세기에 지진과 홍수가 일어나 땅속에 매몰되었다. 19세기 초에 들어와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신전의 메도프·기둥·지붕들 일부가 발견되어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1950년 무렵에는 신전터에서 피디아스의 작업장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 - NAVER백과사전


5.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Temple of Artemis, Herostratus)

[사진출처 : http://nestofpnix.egloos.com/tag/아르테미스신전/page/1]

소아시아의 그리스인 식민지 에페소스에 있던 여신 아르테미스를 모신 신전. BC 8세기경 장대하고 화려하게 세워진 신전으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가 되었다. 신전은 처음에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의 협조로 만들어졌는데, BC 356년의 알렉산드로스대왕 탄생일의 헤로스트라토스의 방화로 소실된 후 재건되었다. - NAVER백과사전


6. 핼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로스 영묘

[사진출처 : http://miraculum.egloos.com/page/3]

페르시아 제국 카리아의 총독 마우솔로스를 위하여 그리스의 할리카르나소스에 건조된 장려한 무덤기념물이다.
면적 29×35.6 m, 높이 50 m. 할리카르나소스의 묘묘(墓廟)라고도 한다. 마우솔로스의 생전에 착공되었으나, 그가 죽은 뒤 왕비 아르테미시아가 계속 진행하였으나 완성된 시기는 왕비 아르테미시아가 죽은(BC 350) 뒤로 추측된다.
설계는 사티로스와 피테오스가 하였다. 동서남북의 장식조각은 각각 스코파스, 레오카레스, 티모테오스, 브리아크시스가 담당하였다.
각 면의 조각·프리즈는 발굴되어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또, 로마인은 비슷한 대규모의 분묘건축(墳墓建築)도 마우솔레움이라고 일컬었다. 마우솔레움은 그 특이한 모양과 복잡한 장식 때문에 세계의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혔다. - NAVER오픈사전


7.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파로스 등대는 기원전 3세기 경 알렉산드로스 대왕 휘하의 장군이자 헬레니즘-이집트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첫번째 통치자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에 의해 건축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자 프톨레마이오스는 스스로 이집트의 왕으로 즉위하여 자신을 소테르(구원자 라는 뜻)로 칭하고 알렉산드리아 항구 부근의 파로스 섬에 등대를 건축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등대의 건축이 시작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2세 대에 이르러 완공되었다. 정확한 완공 시기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기원전 280년경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치세에 크니도스의 소스트라투스라는 건축가에 의해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전설에 따르면 등대는 하얀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높이가 약 130 미터에 달했으며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맨 아랫부분은 정사각형의 거대한 성채, 중간 부분은 팔각형 맨 윗부부은 원형으로 만들어졌는데 맨 윗부분에서 빛이 나와 불을 밝혔다고 하며, 맨 꼭대기에는 신의 조각상이 있었다. 불빛이 나오는 부분에는 거다란 거울같은 반사경이 있어 밤에 빛을 반사했으며 건물자체는 워낙에 커서 군대의 막사 역할도 했다. 이 등대의 불빛은 머나 먼 43 킬로미터 밖에서도 보일 만큼 밝았다고 한다.
등대 건물은 매우 견고하게 지어져서 1183년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주바일의 기록에도 등장하지만 1303년과 1323년의 대지진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1480년 이집트의 술탄 카이트베이가 그 잔해로 카이트베이 요새를 만들어 완전히 사라졌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로 등대의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었으며, 바다 속의 잔해물들도 발견되었다. - WIKIPEDIA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던 소스트라투스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네. 자네가 생각한 방법도 고려해 봤을 거야. 어쨌든 소스트라투스는 결국 자신이 등대를 만들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릴 좋은 생각을 해냈지. 그리곤 등대의 대리석에 '테크리시노프스의 아들 소스트라투스, 항해의 신을 위해 이 등대를 만들다'라는 멋진 글귀를 새겨 넣었지." (중략)
"하지만 그 위에 또다시 반죽한 대리석 가루를 입혀 자신의 이름을 가렸다네. 그리고 반죽한 대리석 가루를 입힌 그 위에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이 등대를 만들었다는 글귀를 새겼지. 세월이 흐르면 발라놓은 대리석 반죽 가루는 점점 비바람에 씻겨 나가 프톨레마이오스가 이 등대를 세웠다는 글귀는 사라지게 되지. 결국 나중에는 진짜 대리석에 새겨져 있던 글귀가 드러나 이 등대를 실제로 만든 소스트라투스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것이지. 그렇게 하면 후세 사람들이 이 등대를 만든 진짜 주인공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 수 있지 않겠나." - <1%다르게, 김영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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