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월간산 2017.12월호 (통권 5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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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목골절로 늦춰진 등산학교 교육과정을 통한 진짜 산꾼 되기
‘네팔에서 348일 만에 도착한 엽서’
월요병을 이겨내고 하루를 무사히 마치고, 집에 도착하니 우편함에 네팔 소인이 찍힌 우편엽서가 도착해 있었다. 지난해 11월 코오롱등산학교 히말라야 등반과정을 통해 간잘라피크(5,675m) 등정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 카트만두에서 내가 나에게 부쳤던 엽서다. 한동안 소식이 없기에 분실되었나보다 생각하고 잊고 지냈는데, 2016년 11월 10일 발송한 엽서가 2017년 10월 23일 내 손에 도착했다.
‘첫 도전의 설렘을 잊지 않기를. 꿈을 그릴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았던 등산학교 선생님들, 김재수 대장님, 착하고 순박한 셰르파들. 언젠가는 더 높은 산을 오를 수 있기를. 그리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며… (중략)’
엽서를 손에 들고 순간 멍해 있다가, 나에게 남긴 메시지를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다 보니, 지난 1년여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꽃 피는 춘삼월이 지나고 나는 또다시 코오롱등산학교를 찾았다. 이번에는 정규반이었다. 등반 기술을 가르쳐주는 곳은 많았지만 산악문학, 산의 위험 그리고 세계 및 한국 주요 등반사 등을 아우르며 산에 대한 철학을 함께 배울 수 있는 과정은 정규반이 거의 유일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봄, 나는 사고로 발목이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다. 폭주기관차처럼 스스로 멈추지 못하는 나에게 조금 쉬었다 가라는 의미일 거라고, 잠시 숨 쉴 틈을 주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 재활을 해야 했던 몇 개월, 산에 가지 못하는 주말이 참 견디기 힘들었다.
제법 걸을 만해졌다고 느낄 무렵, 계절은 여름을 지나 어느새 가을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등산학교 가을 정규반의 문을 두드렸다.
“등산학교? 등산을 돈 주고 배우는 거야?”
내가 6주 동안 주말에 등산학교에 갈 거라고 하니 친구가 물었다. 나는 ‘네가 요리학원 가서 요리 만들고, 꽃꽂이 배우러 문화센터 다니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취미생활을 배우는 데 등산이라고 다르지 않다’고 설명해 주었다.
“나야 요리 맛있게 만들어 먹으려고 요리학원 다니는 거지. 내가 만들면 맛이 없으니까.”
내 설명이 뭔가 개운하지 않다는 걸 느끼고 다시 설명해 보려고 애썼다.
“산에 즐겁고 안전하게 다니려고. 암벽 등반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익혀야 하는 안전에 관한 시스템이 있거든.”
이번에는 꽤 괜찮게 대답한 것 같았다. 그런데 친구가 다시 물었다.
“산에는 왜 가는데?”
주말이면 늘 산에 다녔는데, 왜 산에 다니는지, 등산학교를 왜 찾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냥 산에 가고 싶으니까 가는 거지, 굳이 의미를 고민해 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사실 이런 질문에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할지 잘 몰랐다.
막상 교육이 시작되니 이 좋은 걸 왜 이제야 시작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정규반은 바쁜 직장인을 위해 총 6주에 걸쳐 주말 1박2일 교육으로 진행된다. 토요일에 우이동 교육센터에서 이론 교육을 받고, 동기들과 합숙으로 하룻밤을 보낸 후, 일요일 북한산 일원에서 실기 교육을 진행하는 형태이다.
이론 교육으로 독도법을 배운 날에는 잠들기 전 천장에 등고선이 그려졌고, 매듭법을 배운 날에는 토막 로프를 손에 쥐고 밤새 각종 매듭법을 연습하느라 꼼지락거렸다.
실습 교육이 있는 일요일은 동기, 선생님들과 함께하는 모든 시간이 즐거웠다. 가파른 슬랩에서 겁을 집어먹고는 다리가 개다리춤을 추다가도 응원하는 동기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선생님이 곁에 다가 오면 두려움이 씻은 듯 사라지곤 했다.
한 주 교육을 마치고 월요일이 되면, 어서 빨리 주말이 왔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야말로 몸은 회사에 있지만 마음은 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부장님 죄송합니다).
배우는 게 마냥 설레고 학교 가는 날을 이렇게 손꼽아 기다렸던 적이 언제였던가. 다음 주말 교육에 노적봉 실습이 예정되어 있으면 미리 루트를 찾아보는 예습도 하고, 산악문학 수업을 듣고 난 후에는 절판되어 구할 수 없는 각종 산서들을 빌려 읽으며 복습을 했다. 학창시절에 이 정성으로 공부를 했으면 뭐가 되어도 됐을 텐데 말이다.
일요일에는 실습교육을 위해 늘 북한산에 올랐다. 백운대 슬랩, 노적봉 등 북한산 곳곳의 바위에서 훈련을 했다. 이곳에서 우리는 산에 대한 열망을 키워나갔다. 매주말이면 즐거운 산 추억을 한 켜 한 켜 쌓았다. 안전하게 교육과정을 마치고 졸업해서 주말에 가끔 등반을 즐기는 소박한 꿈을 꾸는 동기부터 더 큰 산을 꿈꾸는 동기까지, 저마다 목표는 조금씩 달랐지만 우리는 모두 같은 길을 걸었다.
인수봉 졸업 등반과 수료식을 마치고, 선생님들은 교육생들을 향해 격려와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차승기 강사-“졸업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의 등반은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하고 싶은 등반이나 장비 등 궁금한 내용은 연락 주시면 언제든지 조언해드리겠습니다.”
이동윤 강사-“졸업을 축하드립니다. 등반 놀이꾼, 산꾼, 철새가 아닌 숭고한 뜻을 지닌 진정한 산악인으로 첫발을 디딘 모든 졸업생들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합니다. 사람은 산을 만들고 산은 사람을 만듭니다. 감사합니다.”
이영준 강사-“6주간 정말 즐거웠습니다. 모두 오래오래 안전한 산행하세요~ 우이동에 오시면 언제든 만날 수 있으니 서운해 마시고. 선배들이 오래 쌓아 올린 체험과 지식을 우정으로 넘겨주며 후배들을 껴안는 끈끈한 66기가 되기를 응원합니다!”
등산학교 교육은 끝이 났지만, 우리들의 산을 향한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사회생활에서 또는 조직 내에서는 너의 일과 나의 일에 뚜렷한 경계가 있고, 내가 이만큼 성과를 달성했다고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 또 실적에 이익이 되지 않는 일은 떠맡으려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자연스레 사람 사이의 관계에 계산이 자리 잡는다.
그러나 산에서는 무거우면 나누어지고, 힘들어하는 동료가 있으면 함께 가고자 끌어주고 기다려준다. 내가 더 많이 들었다고 증명할 필요도 없고, 동료를 30분 기다렸다고 내 실적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었다. 함께 가는 것이 만고의 진리이자 산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당연히 동료와 함께하고자 한다. 이런 산 사람들이 참 좋았다.
정규반을 졸업하고 나니 나는 이제 등산학교를 왜 가냐, 산을 왜 오르냐고 묻는 말에 조금은 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가야 하는 이 세상에서 언제든지 정신줄을 놓고 마음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산 선배, 동기들을 만났다는 것, 참 행운이고 감사한 일이다. 이 멋진 사람들은 내가 산을 찾을 때면, 또는 힘이 들 때마다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줄 테지. 등산학교에서 희로애락의 감정을 함께 나눈 우리는 이제 ‘산 여정의 동반자’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은 인연이 되었다. 모자란 듯 손해 보며 계산하지 않고 서로를 아끼고 보듬어 주는 이 사람들이 참 좋다.
특히 너그러운 마음으로 교육생들을 이끄느라 고생이 많았던 선생님들께, 부끄러워 미처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지면을 빌어 고백한다.
“감사한 일이 더 많은 것 같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좋은 산 선배님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산에 가고 싶은 이유가 하나 더 늘었습니다. 산에 가고 싶은 이유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귀찮게 해드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로써 나의 최종학력은 등산학교가 되었다.
지난 2개월 동안, 사회에서 완벽한 삶을 살고 있는 친구들의 육아 이야기로 가득 찬 단체 메시지 방도 잠시 잊고, 치열하게 돌아가는 회사의 시간도 잠시 잊고, 매주말이면 등산학교에 와서 북한산에 스며들어 많이 받고 채우며, 여러 가지를 되짚어 생각하는 시간을 보냈다.
‘제때’라고 말하는 나이보다 늦게 대학에 갔고, ‘제때’라는 나이에 시집도 못 가고… 우리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약속된 시간보다 한 박자씩 느리게 살고 있는 셈인데, 초조해야 할 이 나이에 아직도 철이 들지 않았나보다.
이번 가을 등산학교에서 채워진 의미들로 당분간은 주말마다 산에서 시간을 보낼 것 같다. 아니 앞으로의 인생에서 꽤 많은 시간들을 산에서 보낼 것 같다. 그래,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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