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사람과산 2019 12월호 (Vol. 361)
사색의 땅 이집트의 매력에 빠지다
글·사진 차승준
청(靑) 푸른빛 물든 청명한 하늘
샤름 엘-셰이크(Sharm El-Sheikh) 공항에 도착해 하늘을 보자마자 물감을 풀어 놓은 듯 파란 하늘빛이 나를 휘감았다. 무채색의 사막을 예상했는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곳의 하늘은 푸른 매력으로 나를 유혹했다. 콧속으로 스며드는 공기마저 청량하다. 이집트의 첫인상이 좋다.
사실 이번 원정을 계획하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등반 대상지인 와디 크나이(Wadi Qnai)가 위치한 이집트의 시나이반도(Sinai Peninsula)는 반정부 세력이나 종교적 문제 등으로 테러나 관광객 대상 납치, 살인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곳이었다. 하지만 막상 발을 디디니, 아름다운 홍해를 끌어안은 땅,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다는 순례의 땅, 그 모든 걱정을 불식시키는 듯 미사여구만이 떠오를 뿐이다. 더 늦기 전에 다합(Dahab)으로 이동을 서둘렀다. 등반지에서도 가깝고 물가가 저렴한 곳이라, 다합을 베이스캠프 삼아 움직일 요량이다.
황(黃)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길, 성스러운 시나이 산
다합 시내의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영국인 클라이머 야나(Jana)와 이곳에 머물며 와디 크나이 지역 등반도 하고, 시나이산(Mt. Sinai, 2,285m)에 함께 오르기로 의기투합을 했다.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다는 '시나이산'. '기독교와 천주교, 이슬람교, 유대교 모두의 성지로 유명한 시나이반도. 그중에서도 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시나이 산(Mt. Sinai, 2,285m). 정상에는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이슬람교의 사원이 있다. 산기슭에는 그리스정교의 성녀 카타리나 수도원(St. Catherine's Monastery)이 있고, 신약성서의 최고 사본 중 하나로 알려진 코덱스 시나이티쿠스(Codex Sinaiticus; 시나이 사본, 4세기 시대의 그리스어로 쓰인 성서 사본)가 발견되었다고 알려진다. 때문에 시나이 산은 성지순례를 위해 많은 관광객이 찾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다양한 종교적 의미를 갖는 성스로운 곳이지만, 정상까지 오르는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2,000m가 넘는 높이에 광활한 지역에 험한 산악지형인데다, 등산로 초입부터 풀 한 포기, 물 한 방울 없는 메마른 돌과 모래로 채워진 길이 정상까지 이어진다.
새벽 2시경 등반을 시작하면 정상에서 황홀한 일출을 볼 수 있다기에 야간 산행을 감행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전날 늦은 시간에 먹은 생선요리가 탈이 났는지 영 기운이 없었다. 아무리 태양이 뜨거운 사막 지형이라지만 여기도 이제 겨울이 아니던가. 태양이 없는 사막의 밤은 춥다. 한겨울 추위나 고산의 추위처럼 살을 에는 추위는 아니지만, 건조한 기후의 모래바람을 머금은 날카로운 추위다. 우리는 오전에는 산기슭의 성녀 카타리나 수도원을 둘러보며 쉬엄 쉬엄 관광객 모드로 여유를 부리다가, 추위를 피해 점심 나절부터 등반을 시작해서 따뜻한 해를 받으며 정상에 올라 해가 지기 전까지 하산을 마치기로 계획했다.
드디어 성스러운 산에 발을 디뎠다. 등산로 초입에서 컨디션 난조를 핑계 삼아 낙타 등에 올라탔는데, 웬걸. 편하게 갈 요량이었지만 낙타가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속이 메스꺼려 구토가 나니, 아무래도 내 발로 걷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얼마나 걸었을까, 작열하는 태양에 입이 바짝바짝 말라 온다. 그늘 한 점 없는 마른 길에 바람까지 불어 입에서는 모래가 잘근잘근 씹히니 더 갈증이 난다.
쉬엄쉬엄 걸으며 이제 다 왔나 싶을 때쯤, 깎아지른 듯 가파른 계단 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그 끝도 보이지 않는다. 3,750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참회의 계단(SiketSayidna Musa)이다. 가히 이 길을 올라 정상에 도착하면 그 누구라도 참회할 법하다. 그간 지나온 과거의 일들이 떠오르며, 앞으로는 어떻게 살고 싶다는 다짐을 하다 보니 어느덧 정상에 도달했다. 정상부도 특별할 것 없이 그저 울퉁불퉁한 바위들만 터를 잡고 있어 황량할 뿐이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가장 높은 곳에 서서 동서남북 아래를 둘러보니, 한낮의 태양빛을 휘감은 바위산 전체가 금빛 찬란하게 빛이 난다.
흑(黑) 별, 바람 그리고 검은 사막의 밤
시나이산 등산을 마치고 다시 다합으로 돌아왔다. 컨디션을 회복할 겸 며칠 바다를 즐기며 여유를 즐기고 있자니, 이내 바위가 그리워졌다. 이곳에 오기 전 여러 곳을 수소문해 찾은 사막의 바위, 와디 크나이 암장으로 향했다. 다합 시내에서 30분 남짓한 거리지만,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이곳에서 암장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 해서 우리는 암장 주변의 한적한 곳에서 야영을 하며 등반을 하기로 했다. 현지에서 가이드 등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타니스를 통해 야영지 정보를 얻고 타니스의 추천으로 우리는 베두인 스타일로 사막에 머물기로 했다.
시나이반도는 베두인족의 삶의 터전이다. 아랍어로 '사막의 거주민'을 뜻하는 베두인(Bedouin) 족은 아랍계 유목민으로 주로 낙타, 염소 등을 사육하며 생활한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하듯, 베두인 지역에서는 베두인 스타일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가볍게 등반 짐을 꾸려 느지막이 암장에 도착했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는 모래 더미를 베개 삼아, 밤하늘의 별들을 이불 삼아 잠이 들었다. 사막 여우들의 울음소리가 제법 가깝게 들리는 통에 몇 번 잠에서 깨긴 했지만, 붉은 바위들이 병풍이 되어 황량한 바람을 막아주니 제법 아늑하다.
새벽녘 찬 공기에 눈을 떴다.아직 떠오르지 않은 태양의 여명을 머금은 황홀한 광경이 우리 곁에 내려앉았다. 숨 막히게 아름다운 사막의 밤. 그리고 그보다 더 아름다운 사막의 여명. 아무래도 이집트의 매력에 푹 빠져버린 것 같다. 이곳에 머무르고 있으면서도 벌써 이곳이 그리운 듯 하다.
적(赤) 붉은 바위, 와디 크나이
"어휴, 왜 이렇게 미끄러운 거야?"
"그러니까 슬랩이지!"
독일인 클라이머 티모가 개구지게 놀린다. 자신 있다며 먼저 등반을 나섰다가, 몇 차례 미끄러지니 나도 모르게 엄살이 튀어나왔다. 쿵쿵 쿵쿵. 쫄깃한 슬랩에 몇 번 미끄러지고 나니 심장이 두 방망이질을 친다. 루트 이름이 왜 하트비트(Heartbeat)인지 이해가 가는 심정이다.
"한 번만 다시 가볼게"
난이도 5.10a 경사가 얼마 되지 않아 보이기에 얕잡아봤는데 영 체면이 서질 않는다. 폭포 섹터는 대부분 슬랩성 루트로 이루어져 있다. 암질은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단단하지만, 사막 화강암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미끄러웠다. 누가 기름칠을 해놓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늘진 지형에 선선한 바람이 부는데도 한나절 등반을 마치고 나니 겉옷까지 축축해질 정도로 땀에 흥건히 젖었다. 인수봉 슬랩 루트들이 아무리 짜다 한들 이곳만큼 짭짤하진 않으리라.
이튿날은 낙타 협곡(Camel Canyon) 섹터로 이동했다. 야나와 단둘이 이곳의 백미라는 아프리카 킹(Africa King, 5.11b)과 아프리카 퀸(Africa Queen, 5.9) 루트에서 한참을 씨름했다.
"너무 무서워!"
"걱정 마, 내가 빌레이 잘 보고 있어."
로프 등반이 익숙하지 않은 야나가 거듭 불안해한다. 스포츠 루트에 익숙한 나를 위해 오늘은 로프 등반을 하고, 이튿날은 야나의 주 종목인 볼더링을 즐기기로 약속한 터였다. 등반 파트너 없이 혼자 이곳을 찾은 나를 위해, 용기를 내서 톱로핑 등반에 나선 야나가 고마울 따름이었다. 빌레이를 보는 시간이 길어져서 본의 아니게 바위를 한참 바라보다 보니 낙타 협곡 섹터의 바위들은 유독 더 붉은 빛을 띠었다. 붉은 빛 사막 바위의 묘한 매력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으랴.
다시 또 사막의 해가 밝고, 아침 일찍 볼더링 섹터에서 등반을 시작했다.
볼더링 섹터에는 각국의 클라이머들이 있었고, 서로 응원을 하며 금방 친해졌다. 갤러리가 많아진 통에 과감하게 손동작을 하지 못하고 멈칫거리니, 볼더링이 주 종목인 야나가 내 동선을 따라 세심하게 볼더 패드를 옮기며 거듭 버벅대는 나를 격려한다.
"거기서 오른손 던져."
"왼발 훅."
"그렇지, 버텨 버텨."
힘을 요구하는 과감한 동작이 필요한 볼더 문제부터, 밸런스가 요구되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문제. 그리고 창의력을 발휘해야 하는 문제까지 다양한 볼더를 경험을 하고 보니 볼더링도 나름 매력이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좋아하는 루트만 편식하듯 등반하지 않고, 볼더링을 포함해서 다양한 등반을 해봐야겠다.
정오가 지나 해가 머리 꼭대기를 지날 무렵, 우리를 다합에서 이곳까지 태워줬던 베두인 운전사와 그의 아내가 점심을 먹으라며 가벼운 찬거리를 들고 찾아왔다. 돌아가면서 바위에 붙어야 하니, 한데 모여 옹기 종기 점심을 먹지 못하고 각개전투로 허기를 달랬다. 우리들이 등반을 하거나 말거나 시끄러운 와중에도, 운전사와 아내가 한켠에서 경건히 기도를 오린다. 그네들의 기도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끊임없이 까르르 웃으며 태양의 열기보다도 더 뜨거운 등반 열정을 태우다 보니, 어느덧 등반을 매듭짓고 다시 문명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사막에는 시계는 없는데 시간은 참 빨리도 지나간다. 붉은 자태를 뽐내는 화강암의 매력, 언제 다시 또 만날 수 있을까. 성스러운 산도 사막의 밤도 그리고 붉은 바위도 그 모든 것이 좋았다.
■ Information. 와디 크나이 (Wadi Qnai)
와디 크나이(Wadi Qnai)는 아랍어로 '수로의 계곡(Valley of the Aqueduct)'을 뜻한다. 다합에서 남쪽으로 약 17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시내에서 한참 떨어져 있어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수신 상태가 좋지 않아 휴대폰 사용이 어렵다. 덕분에 본의 아니게 문명의 세계에서 벗어나 방랑자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으니 그 또한 좋지 아니한가.
딱히 정해진 등반 시즌이 없다. 11월에서 2월 사이는 시나이반도의 겨울이지만, 기온이 10~20도 사이로 온화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 등반하기에는 더 없이 좋다. 겨울에도 등반하기 좋은 온도와,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사막 기후 탓에 척박한 환경에도 암장이 발달할 수 있었으리라. 가파른 계곡으로 인해 하루 종일 그늘에서 등반이 가능한 섹터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늘이어도 사막 지형으로 매우 건조하기 때문에 식수를 넉넉히 준비해야 한다. 일부 볼더링 섹터는 뜨거운 태양을 피할 곳이 없으므로, 10시 이전 또는 2시 30분 이후에 등반하기 좋다.
와디 크나이는 다양한 섹터와 스포츠 클라이밍 루트, 볼더링 문제 등이 종합선물세트처럼 즐비해서 원하는 스타일대로 등반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5.7~5.12까지 수십여 개의 스포츠 루트들은 60m 자일 한 동과 퀵드로우 10~15개, 슬링류 일부만 지참하면 어느 곳이든 등반이 가능하다.
대표적으로 폭포(Waterfalls) 섹터 (루트 길이: 20~30m), 크나이 아드샨 (Qnai Adshan) 섹터, 미들 크나이 (Middle Qnai) 섹터, 낙타 협곡 (Camel Canyon) 섹터, 베두인의 정원 (Bedouin Garden) 섹터, 볼더링 섹터 등이 있다.
암장 위치
다합 남쪽의 28˚27'01.5"N 34˚27'28.4"E
이동 경로
1) 인천공항 ~ (뭄바이, 카이로 경유) ~ 샤름 엘-셰이크 공항 (약 18시간, 환승시간 제외)
2) 육로
- 샤름 엘-셰이크 공항 ~ 다합 (90km, 약 1.5시간)
- 다합 ~ 와디크나이 지역 입구 (17km, 약 20~30분)
* 다합에서 와디 크나이까지 도보로도 이동 가능하며 2시간 정도 소요된다.
3) 어프로치 : 입구에서 암장 지역까지 차량 이동 가능 (거친 사막 지형 비포장도로이므로 오프로드 주행 가능한 지프 종류 차량 필요)
숙박
다합 시내 게스트하우스 또는 호텔, 1박 기준 1~10만원까지 다양함.
기타
시나이 락 클라이밍 센터(Sinai Rock Climbing Center)에서 교통비 포함 100~200 유로의 가격에 베두인 사막에서 베두인 스타일 야영을 포함한 등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www.sinairockclimbing.com, +20-100-404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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